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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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박정희와의 갈등 끝에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되어 암살된 사건이다. 김형욱은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거쳐 중앙정보부 부장을 역임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고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박정희의 미움을 샀고, 결국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은 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김재규의 단독 범행인지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을 남겼으며, 관련자들의 진술 거부 등으로 진실 규명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형욱은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중앙정보부장 재임 6년 동안 각종 정치적 사건에 간여하며 정적을 제거했고, 이후락, 윤필용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 3인방으로 비난받았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무소불위의 횡포를 부렸고, 부정선거에 앞장섰으며, 국회의원들을 사찰하고 협박했다.[2]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재임 6년 동안 각종 정치적인 사건에 간여하며 악역을 자처했고 가차없이 정적을 제거하면서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보좌하였다.[2] 이 과정에서 이후락, 윤필용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 3인방으로 낙인찍혀 국민적 원성과 비난을 받았다. 김형욱은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횡포를 일삼았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거철에는 금권, 관권을 동원하며 부정선거에 앞장섰고,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사찰하여 축첩 등 사생활의 비리를 캐내 필요하면 언제든지 함정을 파서 약점을 잡은 뒤 협박을 일삼았다.[2]
2. 5.16 군사정변과 출세
2. 1. 군 경력과 5.16 군사정변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한 후 군 생활을 했다. 1961년 육군 중령 시절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2]
2. 2.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한 후 군 생활을 했다. 1961년 박정희(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다.[2]
3. 중앙정보부장 재임과 권력 남용
3. 1. 중앙정보부장 임명과 예편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한 후 군 생활을 했다. 1961년 육군 중령 시절 박정희(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2]
3. 2. 정치적 사건 개입과 정적 제거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한 후 군 생활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에 임명된 후 10월 13일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중앙정보부 부장 재임 6년 동안 각종 정치적인 사건에 간여하며 악역을 자처했고 가차 없이 정적을 제거하면서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보좌하였다.[2]
이후락, 윤필용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 3인방으로 낙인찍히며 국민적 원성과 비난을 받았던 김형욱은 대통령의 신망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횡포를 일삼았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거철에는 금권, 관권을 동원하며 부정선거에 앞장섰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사찰하여 축첩 등 사생활의 비리를 캐냈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함정을 파서 약점을 잡은 뒤 협박을 일삼았다.[2]
3. 3. 권력형 부정축재와 국민적 비난
김형욱은 이후락, 윤필용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 3인방으로 낙인찍혀 국민적 원성과 비난을 받았다.[2] 김형욱은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횡포를 일삼았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2] 선거철에는 금권, 관권을 동원하며 부정선거에 앞장섰고,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사찰하여 축첩 등 사생활의 비리를 캐냈다.[2] 또한 필요하면 언제든지 함정을 파서 약점을 잡은 뒤 협박을 일삼았다.[2]
4. 3선 개헌과 몰락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여당 국회의원조차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친 김형욱은 권력 남용과 의정활동 간섭으로 1969년 여당인 공화당으로부터 박정희에게 이후락과 함께 해임이 건의되었다. 이는 3선 개헌의 선행 조건으로, 이만섭 의원이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제안하여 당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3선 개헌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이를 수용, 개헌안이 날치기 통과 및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1969년 10월 20일 김형욱을 전격 경질하였다.[3][4][5]
6년간 박정희의 그림자처럼 충성했던 김형욱은 경질에 불만을 표출했다. 반면, 함께 경질된 이후락은 주일본 대사로 발령받고[8] 이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복귀하는 등 김형욱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6][7]
4. 1. 국민복지회 사건과 여당의 반발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여당 국회의원조차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3] 김형욱의 권력 남용과 의정활동 간섭이 지나치자,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이후락의 해임을 3선 개헌의 선행 조건으로 제시하였다.[4] 이 제안은 7월 29일, 3선 개헌 논의를 위한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이 제안했고, 당의 공식 입장으로 결정되었다. 3선 개헌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이를 수용했고, 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된 후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1969년 10월 20일에 김형욱을 전격 경질하였다.[5]4. 2. 3선 개헌과 김형욱 해임 요구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지면서, 여당 국회의원조차 고문하는 김형욱의 행태는 악명을 떨쳤다.[3] 김형욱의 권력 남용과 의정 활동 간섭이 심해지자,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이후락의 해임을 3선 개헌의 선행 조건으로 제시했다.[4] 1969년 7월 29일, 3선 개헌 논의를 위해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이 이 제안을 했고, 이는 당의 공식 입장으로 결정되었다. 3선 개헌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이를 수용했고,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된 후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1969년 10월 20일 김형욱을 전격 경질했다.[5]4. 3. 경질과 이후락과의 비교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지자 여당 국회의원조차 고문하는 일을 자행하며 악명을 떨쳤다.[3] 김형욱의 권력 남용과 의정 활동 간섭이 지나치자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이후락의 해임을 '3선 개헌의 선행 조건'으로 제시하였다.[4] 이 제안은 7월 29일, 3선 개헌에 관한 논의차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이 제안하였고 당의 공식 입장으로 결정되었다. 3선 개헌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이를 수용했고 개헌이 날치기 통과된 후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1969년 10월 20일에 전격적으로 김형욱을 경질하였다.[5]김형욱은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박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밤낮없이 온갖 비난을 받으며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당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같은 날 함께 경질된 이후락은 박정희 신봉자답게 김형욱과는 정반대로 처신했다.[6][7] 그 때문인지 이후락은 곧 주일본 대사로 발령받았으나[8] 김형욱은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냈다.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권력 실세로 복귀했으나 김형욱은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5. 미국 망명과 폭로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게 된 김형욱은 1973년 4월 15일 중화민국 학술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타이완으로 출국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15]
5. 1. 유신 선포와 국회의원직 상실
1971년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으나,[9]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자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1973년 3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에서 제외되었는데,[16][10] 이는 지난번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된 후 야당의 리더인 김대중과 비밀리에 자주 접촉하며 협력한 것 때문이었다.[11][12][13] 이 일로 김형욱은 청와대로 몇 번 불려가 추궁당했으며,[14] 총선 공천 후보 명단에도 누락되는 수모를 겪었다.5. 2. 망명 결심과 미국행
1971년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으나,[9]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자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1973년 3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에서 제외되었다.[16][10] 이는 지난번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된 후,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 비밀리에 자주 접촉하며 협력한 것 때문이었다.[11][12][13] 김형욱은 이 일로 청와대로 여러 번 불려가 추궁당했으며,[14] 총선 공천 후보 명단에서도 누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게 되었고 망명을 최종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중화민국 학술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타이완으로 출국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15]5. 3. 박정희 정권 비리 폭로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냈다.[16] 그러나 김형욱은 계속되는 설득과 회유에도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 6월 2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16]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 폭로에 나선 이유는,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해임하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17][16]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1977년 6월 22일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부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18] 이후 박정희 정권의 각종 비리가 담긴 회고록을 일본에서 출간하였다.[19][20] 이 책은 김경재(필명 박사월)와 공동 집필 형식을 취했으며, 1980년대에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5. 4. 회고록 출간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냈다.[16]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과 회유에도 김형욱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 6월 2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16]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 폭로에 나선 이유는,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해임하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17][16]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1977년 6월 22일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부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18] 이후 박정희 정권의 각종 비리가 담긴 회고록을 일본에서 출간하였다.[19][20] 이 책은 김경재(필명 박사월)와 공동 집필 형식을 취한 것으로 1980년대에 밀리언셀러가 된다.
6. 파리에서의 암살
1979년 10월 1일,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제1차장 윤일균에게서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통보를 받고 10월 4일 파리로 갔다. 같은 해 10월 7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공작원(중앙정보부 연수생 1명, 외국인 2명)을 보내 김형욱을 납치하여 암살하였다.[21][1][22] 당시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은 김재규의 사주를 받고 현장을 지휘, 방관했다.[21][1][22] 1990년 10월 22일, 서울지방법원은 김형욱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다.[23] 2005년 12월, 재미교포 언론인 안치용이 미국에서 김형욱의 가묘를 발견했으나, 가족들이 추모를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23]
6. 1. 납치 및 암살 과정
1979년 10월 1일,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 윤일균으로부터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통보를 받고, 10월 4일 파리로 갔다.[21][1][22]1979년 10월 7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는 공작원으로 중앙정보부 연수생 1명과 외국인 2명을 파견하여 김형욱을 납치 후 암살하였다.[21][1][22] 이 사건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은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사주를 받고 현장 지휘 및 방관하였다.[21][1][22]
서울지방법원은 1990년 10월 22일, 김형욱에게 최종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렸다.[23]
6. 2. 암살 배후 의혹과 진상 규명 노력
1977년 6월 17일, 박정희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당시 중앙정보부에 하달하였다.[24]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이후 행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므로 정부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임을 명심할 것이며, 본 건에 관한 한 용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미 하원 청문회 직후인 1977년 6월 말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여는 등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에도 부심했었다.[25] 박정희는 김형욱을 염두에 두고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1977년 12월 31일에 제정하기도 하였다.[26]이런 사실들로 볼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단독으로 결정했다기보다는 그 윗선에서 기획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왔던 박정희의 '암살 지시설'에 신빙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25] 그러나 아직까지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김재규를 강도 높게 조사했지만 김형욱에 관한 말은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등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김경재가 쓴 《김형욱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가 내린 암살 관련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 프랑스 공사로 핵심 증인인 이상열은 훗날 1998년 6월, 국가안전기획부 진상 규명 과정에서 배후에 대한 진술을 거부한 바가 있다.
6. 3. 김형욱의 사망 선고와 가묘 발견
1990년 10월 2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김형욱에 대한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23] 2005년 12월 미국에서 재미교포 언론인 안치용에 의해 김형욱의 가묘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이는 가족들에 의해 추모의 의미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3]참조
[1]
Youtube
"[KBS 역사저널 그날] 과거사위가 밝혀낸 김형욱의 최후 (2020년 12월 15일 방영)"
https://www.youtube.[...]
[2]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3]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4]
서적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
2009-08-15
[5]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6]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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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11-25
[8]
서적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
2009-08-15
[9]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10]
뉴스
박정희 최측근 이후락·김형욱은 왜 도망쳐야 했나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6-07-04
[11]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12]
서적
김형욱 회고록 3
아침
1985-10-15
[13]
서적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12-19
[14]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15]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11-25
[16]
뉴스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5-29
[17]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11-25
[18]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11-25
[19]
뉴스
카지노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8-05-30
[20]
서적
김형욱 회고록
아침
1985-10-15
[21]
뉴스
"[오마이 뉴스] 김형욱, 파리 외곽서 권총 7발 '총살' 김재규 지시... 박정희 지시설 미확인"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5-26
[22]
Youtube
남산의 부장들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 -박정희 시대의 2인자들
https://www.youtube.[...]
[23]
웹인용
실종 김형욱 전 중정부장 묘 미국서 발견
https://breaknews.co[...]
2009-09-22
[24]
뉴스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5-29
[25]
뉴스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오마이뉴스
2005-05-29
[26]
뉴스
"[조선일보] 해외거주 반국가 행위자 재산몰수 특별법 제정 1977년 12월 3일 1면 보도"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7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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